시골목사의느릿느릿이야기

새벽 기도회를 다녀와서 잠시 책상 머리에 걸터앉았습니다. 가끔 이렇게 망연한 생각에 젖곤 합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찬물에 떨며 세수를 하고 나니 얼굴이 얼얼한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듯합니다. 향을 피우고 녹차를 천천히 마십니다.
바흐의 음악을 듣습니다. 감상도 괜한 듯하여 밖으로 나섰습니다. 소설小雪이 지나 바람은 차갑습니다.간밤에 촉촉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비안개가 대지에 낮게 드리워졌습니다. 새벽 미명 하얀 길, 비탈에 말없이 선 겨울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무연히 바라보고 있으니 나의 이런 상념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간단한 뉘우침이 생깁니다.

나는 어느덧 지천명이라는 재를 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오십 년 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한 일은 많은 것 같은데 이루어 놓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최근 내가 발견한 삶의 표지는 '천천히' '느릿느릿' 살자는 것 입니다. 무엇이든 후딱 해치우고 마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내 급한 성미를 누그러뜨리는 일도 되겠지만, 더 깊은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느릿느릿' 더 많은 생각과 여유를 갖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뜻을 같이하는 벗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어사지간 중늙은이가 되어서 마음이 통하는 벗들을 가까이 두게 되었으니 그것도 복이지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고수가 바둑알을 하나 두면서도 장고를 하듯이 느리지만 깊이 있게 살고자 합니다.

그동안 [오마이 뉴스]와 [뉴스앤조이]를 비롯해 여기저기 써놓은 글을 골라 예쁜책을 만들어 준 [나무생각]과 [느릿느릿 이야기]서 한솥밥을 먹는 벗들, 지석교회 교우들, 아무 때고 타이핑을 해주는 아딧줄과 넝쿨이, 그리고 지난 이십 년 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의 친구가 되어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박철 / 책을 펴내며-

책을 펴내며
하나 - 꼴찌가 첫째 되는 곳, 교동섬
둘 -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
셋 - 들꽃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넷 -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박철 소개

박철 목사는 민족작가회 소속의 시인이며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장회 전국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현재 각종 신문과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어느 자유인의 고백」,「봄여름가을겨울」,「시골 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행복한 나무는 천천히」등이 있다.박철 목사는 현재 '느릿느릿 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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